신학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요약

관허 2013. 5. 14. 22:47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요약 

 

 

1. 예수님은 누구인가

 

필립 얀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탐구하는 방안으로 “아래서 위로 관찰”하는 방법을 택한다. 교회에서는 4, 5세기 니케아공의회, 칼케돈공의회를 거치면서 교회에서 정립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적 접근방법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립하였지만 이러한 개념은 우리 삶에 직접 와닿지 않는다고 보고 온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인물탐구하는 방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탄생에서는 탄생시의 주변 환경과 정황을 묘사하여 그 분의 경향을 유추하려고 했는데 처녀잉태로 인한 주변의 시각과 탄생지역의 환경, 그 당시 정치적인 상황, 이집트로의 피난생활 등으로부터 예수님의 겸손, 접근 가능함, 희생자(underdog), 용기라는 네가지 특성을 추출해내고 그 특성으로부터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성향을 유추하였다. 神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자로 오신 겸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접근가능하게 하신 점, 권력도 없고 부도 없고 권리와 정의도 없이 쫓겨 다닌 희생자, 인간들 속에 자리잡기로 결심하신 용기를 볼 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 권력없는 자, 압제당하는 자, 즉 희생자들을 선호하시는 경향을 그 탄생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고 얀시는 기술한다.

 

얀시는 계속하여 예수님의 배경을 분석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으며 유대인의 가치관과 관습을 따르셨다. 또 탄생시기도 분석하는데 그 당시는 로마제국의 힘이 절정을 이루던 아우구스투스 시대로 로마제국의 그리스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에 저항하고 그리스화에도 저항하고 있어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향한 기대치가 높았던 시절 즉 한마디로 선동적인 시대적 상황이었다. 예수님이 태어났던 주변지역의 환경도 분석하였는데 고향인 나사렛과 갈릴리는 부와 정치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가난하였고 문화적으로도 낙후되었으나 그 지역의 역사를 보면 자유를 사랑하는 경향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정치적인 세력들도 분석하는데 당시에는 광야에서 수도원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에세네파, 분리주의자로서 무장봉기를 지지하는 열심당원, 노골적인 협조론자인 사두개인, 그리고 정결의식을 견지하는 바리세파 4개의 주요한 세력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제3의 길을 견지하셨으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4개의 당파 모두 유대인들의 고유한 특성을 지키려 했는데 예수가 그 목적에 위협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얀시는 사탄의 시험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에서도 예수님의 특성을 유추해낸다. 사탄의 시험의 내용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나쁜 면 없이 좋은 면만을 취해보라는 것 즉 인간의 규칙을 따르지 말고 규칙을 바꾸어 보라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시험을 거부하셨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빠른 길을 택하시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셨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이었는데 인간은 구약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화려하게 전시한다고 해서 복종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한다. 즉 예수님의 본성은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하였다.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얀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를 구별하는데 하나님의 권세는 내적이고 비강제적인데 반하여 사탄의 권세는 외적이고 강제적이라 하고 교회의 역사를 보나 개인적 성향을 보나 종종 우리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선을 이루려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을 사탄의 작용으로 돌린다. 한편 얀시는 하나님이 악이 만연한 이 세상을 언제까지 인간의 자유에 맡겨두실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그래도 하나님은 이 땅에 재림하여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결점 많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가치있다고 보신다고 한다.

 

1부 마지막으로 얀시는 성경의 일화들을 예로 들어 예수님의 성격이나 특징들을 파악하려하지만 다양한 기술들을 볼 때 어느 틀에 집어넣을 수 없고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현재의 비교대상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경의 기술 들에서는 온전한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기고 하고 인간과는 다른 신의 속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2.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

 

제2부는 예수님의 성육신 목적을 고찰하는데 얀시는 제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래서부터 위로” 관찰하는 방법을 택한다. 보통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관찰하기 위해서 창조, 원죄, 구원, 성육신, 부활 같이 인간의 본성부터 논의를 진행하는데 얀시는 거꾸로 예수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서 인간의 구원 쪽으로 관찰을 함으로써 독자들이 거절할 수 없도록 몰아간다.

 

먼저 얀시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산상수훈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본다. 얀시에 의하면 산상수훈은 3단계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풀이한다. 1단계는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배고픈 자들, 핍박받는 자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2단계로서는 팔복이 인간 현세만을 보더라도 현재에서도 타당한 점이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박한 사람은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자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기기 때문이며 신앙생활에 중요한 자질인 의존성, 겸손, 단순성, 협력 그리고 포기는 편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얻기 어려운 자질이기 때문이다. 3단계로는 산상복음은 심리학적인 진실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깨달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차원의 진실을 설파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산상수훈은 인간 존재의 신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심오한 통찰이자 오히려 실용적인 현실주의자가 선포한 진리라고 한다.

 

얀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산상수훈을 포함하여 원수를 사랑하라, 재물을 나누어 주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등 절대적이고 엄격하며 완벽한 가르침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풀어간다. 이러한 가르침을 준수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일견 불쾌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율법을 더 철저하게 해석하고 밀어붙이신 가르침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얀시는 여기서 과거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인간에 맞게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 소개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precepts(요구)와 counsels(제안)의 구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치명적인 죄와 경미한 죄의 구별, 루터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것과 세상나라에 속한 것의 구별, 재세례파의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의 이런 가르침은 율법 시대의 마지막 흔적이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은혜의 시대로 율법을 대체할 것이라는 설명, 스코필드 성경의 산상수훈은 순수한 율법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도덕적 적용이 된다는 설명, 그리고 알베르트 슈바이쳐의 산상수훈은 예외적인 시대에 필요한 과도기적 요구라는 설명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이 얀시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비성경적이었으나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두 사람을 대비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완벽주의자로서 일생동안 물을 거슬러 오르는 싸움을 하다가 결국 도덕적으로 탈진해 무너졌는데 그의 종교는 궁극적으로 은혜보다는 율법에 관한 것이었고 타락한 세상을 꿰뚫는 하나님에 대한 비젼이라기보다는 자기 향상을 꿈꾸는 인간에 관한 계획이었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명백히 보았으나 그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 단계로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은혜와 용서를 이야기하고 실제로 부활을 경험하였으며 인간은 사랑을 받음으로써만 사랑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그러한 가르침은 절대적 이상과 절대적 은혜를 얘기하는 것으로 복음서의 지고한 이상과 우리 자신의 암울한 현실 사이의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단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결단코 이상에 도달할 수 없으며 또 굳이 도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얘기 한다고 했다.

 

다음 얀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구약의 율법주의에서 신약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대체하기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예수님의 사역당시의 모습과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과 비교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과 오늘날의 교인들과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에 매여 있었으나 예수님은 혁명적인 변화를 몸소 실천하셨고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거룩함(구별하심)에서 하나님의 자비(포용적인)로 옮겼다. 즉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야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를 보면 초대 교회들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박해받는 자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노력했으나 오늘날의 교회는 가진 자들의 공동체가 되어 밑바닥 사람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문제를 지적한다(제3세계의 교회는 좀 다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교회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다음 얀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에 대해 설명한다.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치를 중요하게 보신 예수님이 사탄의 빠른 길을 택하신 것 같은 기적을 베푼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면에서 기적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개개의 기적의 의미를 알레고리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기적은 예수님 주장의 절대적인 증거는 아니며 기적과 믿음의 관계를 볼 때 기적에 동반되는 흥분감이 바로 삶을 변화시키는 믿음으로 전환되지는 않았고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다. 기적은 다만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싶어하시는지의 힌트가 되며 물리적 법칙의 정지가 아니라 회복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 얀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묘사하면서 십자가를 짐으로써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악을 정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무능의 본보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악을 이기는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이것이 악을 이기는 것은 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 의지있고 살아있는 인간존재 속에서 악을 질식시켜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악은 개개인의 사랑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고 얀시는 M. 스캇 펙을 인용해서 얘기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십자가로 상징되는 사랑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다. 얀시는 베드로와 유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하면서 다 같이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있지만 베드로는 회개함으로써 사랑을 받았고 유다는 거부했다는 것이고 십자가 옆에 달렸던 두 도둑도 한사람은 무능만 보았으나 다른 사람은 사랑의 증거임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한다.

 

다음 부활에서는 제자들이 부활을 보게 된 후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맹세하고 전도와 순교의 길로 나아간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교회가 부활을 중심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믿음의 근원을 얘기하면서 믿음은 강요할 수는 없는데 인간의 갈망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마치 우리 인간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계속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간역사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죽음과 같은 인간의 현세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러한 방법에서는 부활은 예외가 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을 출발점으로 삼는 방법으로 이 경우는 부활이 궁극적인 현실의 예표가 된다고 한다.

 

 

3. 예수님은 무엇을 남기셨는가

 

얀시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교회를 남기셨다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곳이고 성육신의 연장이다. 교회의 몸인 인간은 그리스도의 후사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성육신하셨다고 한다. 교회는 그래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앞으로의 일에 대하여 단기계획과 장기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장기계획은 직접 재림하셔서 세상을 정리하시겠다는 것이고 단기계획은 우주의 해방을 이끌 자에게 지구를 넘겨주신 것이라고 한다. 우주의 해방을 이끌 자는 결국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런 일을 제대로 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많은 자들이 교회에 환멸을 느꼈다. 얀시는 그래도 교회는 어두움과 더불어 빛을 가져온 역할을 했다는 것을 긍정하고 불완전한 인간들 위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은 그 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부분에 대해 완전히 책임을 지실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부족한 부분은 인간의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인간이 구원받는 것처럼 교회도 치유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말한다.

 

다음 얀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얘기한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세상나라와 달리 권력을 근거로 하지 않고 인내력, 사랑과 겸손의 토대위에 세워진다. 과거 일부교회에서 권력화한 예가 있으나 교회가 세상나라의 도구를 사용하면 다른 권력구조와 마찬가지로 무력해지거나 포악해진다는 걸 역사가 보여주었다. 따라서 교회가 정치노선화하여서는 안되고 사람들을 다른 종류의 나라,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만 오롯이 기초를 둔 나라로 안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언제 도래할 것인가. 때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또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으로 현재적 측면을 강조하셨고 그런가하면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미래에 속해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를 말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래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재림 때에 충만하게 드러날 것이나 그동안 우리는 좀더 나은 미래를 향해 노력해야 하는데 교회가 대안적인 사회를 창조해서 모범을 보여줄 때 하나님 나라는 정말로 지상에서 성장할 것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정리하는데 첫째는 죄가 없지만 죄인들의 친구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점점더 죄인들의 적으로 보인다고 하며 교회는 죄를 부추기지 않고 죄인을 품을 수 있어야 하는데 콘스탄티누스 이래로 교회는 사회의 도덕적 경찰이 되려는 유혹에 빠졌다고 한다. 둘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으로서 인성과 신성을 다 가지신 분이고 셋째로는 하나님의 초상으로서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신데 예수님은 인간과 거대한 간격을 가진 구약의 하나님에서 아바 아버지 친숙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주셨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넷째로는 인간의 초상으로서 예수는 인간 최고의 본보기가 되시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악을 몸소체험하신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다섯째로는 상처입은 치유자이시라며 예수님의 모습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