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나의 책사랑

관허 2024. 1. 4. 06:52

모든 것에서 은퇴한 지금의 나는 책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어릴 때부터 스스로 책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외할아버지 서재에 꽂혀있었던 일본 의학책 전집은 한 50권 정도 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천연색 사진이 수없이 들어간 의학책은 한동안 나의 관심을 끌었다. 책 종이의 질도 좋았고 사진의 질도 좋았다. 그때 본 병든 신체의 사진과 기형의 사람 등등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국민학교 한 2학년쯤 되었을까 아버지가 병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인 여유가 별로 없을 때였다. 어디선가 "재미있는 자연이야기"라는 어린이용 전집이 나왔다는 것을 보고 마분지 같은  종이에 나의 희망을 적어 부모님 앞에서 데모를 했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드디어 난 50권 정도의 전집을 보유하고 정신없이 읽었다. 물론 만화도 많이 읽었다. 그땐 만화방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다. 나오다가 선생님한테 들키면 그저 다른 데 갔다 오는 길이라고 얼버무렸다. 라이파이니 철인 28 호니 하는 것은 우리 세대만이 알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본어도 모르면서 충무로 일본서점을 기웃거렸다. 그때 용돈을 아껴서 산 일본어 책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있고 나의 꿈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그때 산 조지훈 씨의 "돌의 미학"이라는 책도 간직하고 있다. 정가 500원. 그때 500원이라면 명동에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돈을 아끼기 위하여 전집을 일단 사고 한 달내에 무조건 다 읽고 한달 할부값만 내고 다시 반환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나 "인간 경영" 같은 약 30권짜리 전집을 한 달 만에 다 읽어 내야 했다. 수업시간에 소설을 읽다가 적발되어 책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책에 대한 관심은 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길 가다가도 버린 책이 있으면 한번 뭔가 보고 괜찮으면 주워 오기도 한다. 숙직하다가 도서관 책 정리해서 버린 것을 보고 산더미 같은 책더미에서 몇 권 골라오기도 하고, 직장 상사의 서가를 정리하면서 버린 책은 일단 내가 가져온다. 친척 어른이 돌아가시면 책 유품을 트럭채로 받아 내가 정리하기도 했다. 나의 비전공 분야라도 상관없다. 문과이면서 물리학 책도 모았다. 너무 어려운 책은 물론 버렸다.  브리타니카 전집은 버렸다.

 

요즘도 가끔 중고나라나 당근에서 관심분야 책이 있는지 훑어본다. 중고나라에서 20만원에 산 氣, 불교, 선도, 도교, 요가, 풍수 등의 수백 권의 책은 나의 관심분야의 핵심을 이루고 있고 일본소설 권당 천 원으로 산 160여 권의 책은 나의 일본어 연습의 핵심재료가 되었으며 일본 책 "생명의 실상" 전집, 그리고 일본역사 전집도 읽었다. 그런데 일본어 전공자에게서 산 고전과 근대 일본 문학전집(책꽂이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다)은 아직도 큰 도전과제를 이루고 있다. 당근에서 관심있는 책이 나눔으로 나오면 바로 달려간다.

 

책에 대한 관심은 남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도 그 사람이 무슨 책을 읽는지를 유심히 본다. 한 번은 토요일 다 퇴근하고 난뒤 어떤 사람의 책상에서 책을 가지고 와서 월요일 출근하기 전에 다시 가져다 놓기도 했다.

 

어떤 때는 직장 상사가 나를 불러 영어책을 주면서 주말에 요약해오라든지 일주일 시한을 주면서 요약해오라 하기도 했다. 그런 책은 거의 최신의 자료이기 때문에 난 마다하지 않는다. 과장 시절엔 최신 정보를 남보다 먼저 얻기 위해서 산하연구소에 있는 자료실의 신간잡지 목록을 내가 보고 그 중에 필요한 것은 내용을 복사해 달라고 했다. 이런 관심이 한번은 국방대학원 교수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 교수는 미국에서 산 신간(Put People First라고 기억한다)을 읽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자랑삼아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 책의 제목을 말하면서 읽었다고 하니 그만 할 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나의 관심분야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전공이 법학에다가 경영학 그리고 정치외교, 또 종교에 두루두루 걸치고 있어서 분야가 광범하다. 석사가 3과 4분의 1이 있으니 그렇기도 할 거다.(4분의 1이란 4학기 중 한 학기만 하고 중퇴한 것을 말한다) 고시도 사법고시 공부하다가 행정고시로 바꿨으니 말할 것도 없다. 직장에선 신문도 한국신문으로 부족해서 일본경제신문 Tribune 같은 것도 읽었다.

 

물론 그 많은 책을 다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 많은 책을 버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책들도 있다. 할머니가 쓰시던 우리 고어로 된 성경,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일본 그림책, 내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던 책,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 트럭 분량의 책을 버렸는데 내 친구가 그것을 지나가다 보았단다) 법제처 근무한 대가로 받은 법령전집, (시행령 시행규칙까지 다 있는 전집이다) 사법시험 떨어지고 난 뒤 다시 공부 안 한다고 버린 책들, (손때가 많이 묻은 책들인데) 여러 가지가 생각난다. 

 

그런 책들이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기억에 남지 않으니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든 것이 영양분으로 변해 남아 있으면 다행이고 하늘나라에 축적되어 있으면 다시 꺼내 불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