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명상과 기도에 대하여

관허 2024. 1. 17. 17:44

24.1.17일 자 조선일보에 성공회 윤종모 주교님의 "명상은 도구일 뿐 기독교 신앙과 충돌되지 않는다"라는 요약과 함께 명상의 유익함에 대한 글이 실렸다. 그 옆의 칼럼에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명상을 하면 좋다"는 글이 실렸다. 먼저 뒤의 것에 대하여 본다면 난 예전에 단전호흡을 할 때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단전호흡을 하기도 했다. 자리에 앉았을 때 긴 호흡을 하면 1분에 3번 정도 숨을 쉬게 된다. 30분간 해봤자 100번 정도 숨을 쉬게 된다. 그런데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쉬면 옆사람의 호흡길이를 느낄 수 있는데 거의가 짧은 숨을 쉬기 때문에 일종의 우월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자칫 잘못하면 자세가 바르지 못해 가슴에 불필요한 압박이 가해져서 위험을 느끼기도 했다. 모름지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하려면 그런 위험에 유의해 주면 좋겠다.

 

본론으로 들어가 명상과 기도에 대하여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보통 명상이라 하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잡생각을 줄이고 고요한 마음으로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호흡을 바라본다든지 "옴(AUM)"이라는 소리에 집중한다든지 어떤 그림(만트라)이나 글자를 바라본다든지 화두를 가지고 거기에 마음을 집중한다든지 한다. 가만히 두면 우리 마음은 어디로 가는지 온 우주를 해메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아 두자는 것이다.

 

이런 단계의 명상이라면 마치 밭을 가는 것처럼 명상이 하나의 도구로 기도와는 상충되지 않고 기도의 전단계나 기도의 바탕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당의 신부가 참선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기도원에서 명상을 하고 절에서 참선을 하는 것이 다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단전호흡이나 요가 쪽으로 가면 단전을 만들고 차크라를 활성화시키는 등 다른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난 이것을 "명상"으로 하나의 같은 개념으로 아우를 지는 의문이 드나 보통 우리네 생활에서는 그저 명상으로 통용되지 않나 싶다. 과거 직장에서 한 방을 빌려 수요일은 신우회에서 사용하고 같은 방에서 매일 오전에 국선도 단전호흡을 하게 되어 신우회 회원과 약간의 트라불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벽에 태극기가 있고 국선도 마크가 있어 국선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절을 하고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엄밀히 말한다면 명상이 기도라고, 국선도나 요가가 기도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도는 뭔가 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 바라고 원하옵나이다" 라고 보통 말한다. 위로 우리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뭔가 응답이 올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간절히 원한 것도 아닌데 주어지는 경우도 드물게 생긴다.(경험해 본 사람만이 이 진리를 알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그렇다 반드시 "위로부터"는 아닐 수 있겠다. 주교님 말씀처럼 내 안에 하나님이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니까.

 

그런데 단전호흡이나 요가는 내 몸 안에 단전을 만들거나 차크라를 활성화시켜 몸을 건강하게 하거나 영적인(?) 진화를 꾀하게 된다. 이는 아래로 부터 위로 향하는 소통방식이라고 할까.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나 독립적으로 힘을 축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라고 할까. 이런 단계에 이르면 명상이 기도가 아니게 된다. 아니면 신성모독이 될까. 

 

난 그동안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 온 요가나 도교, 선도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없다. 난 위로부터 오는 축복과 아래로부터 생성되는 우리의 능력 개발(물론 위로부터 오는 것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될 테지만)을 부정하지 않겠다. 둘 다 경험해 본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네 종교인이나 수련인은 이 두 가지 모두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열고 타종교를 바라보고 경험해 보고 또 일종의 다른 수련법도 경험해 보면 우리의 마음이 넓어질 수 있을까. 진리를 장님 코끼리 만지듯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