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tting에 대하여
외국의 어느 분이(줄리아 켈러) Quitting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제 난 굳이 전문을 읽지 않아도 웬만한 것은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소개 글에 보니 Quittng이 적자생존으로 가는 하나의 진화기술이란다. 요즘 젊은이들이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가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다든가 대학도 여기저기 옮기는 현상을 진화의 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Quiet Quitting이니 Quasi Quitting이니 하는 말도 나온다.
물론 나도 Quitting이 하나의 진화 기술이라고 생각은 한다. 그러나 Quitting의 반대도 하나의 진화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Quitting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난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할까 조직 자체의 진화를 만드는 참을성이라 할까 이런 것도 지금까지의 세계에서는 큰 발전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의 진화관에 대한 의견을 잠시 말한다면 種안에서는 진화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종 자체를 뛰어넘는 진화는 없고 난 창조가 그 역할을 한다고 믿는 편이다. 조물주가 그런 생명체를 만들지 않고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거슬러 생명체가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Quitting은 예를 든다면 나비가 꿀을 찾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러면 식물은 더 좋은 꿀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선택받지 못하는 식물은 도태의 길을 갈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진화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충성이라는 것은 어떤 조직 내에 들어가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를 들자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체 얘기 하다가 갑자기 조직을 얘기하다니 의아해하겠지만 Quiet Quitting이니 Quasi Quitting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진화의 법칙은 대우주나 소우주에도 같이 적용되는 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법칙은 인간에게도 인간의 조직에도 또 국가 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한다.
난 사법시험을 공부하다가 바로 그만두고 행정고시로 갔다. 그리고는 내의사로 부처를 옮기는 것은 법제처에서 상공부로 간 것 뿐 다른 이동은 조직에서 보내는 것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는 거기서 내 역할을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조직의 현실화 조직의 진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조직에 충성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많은 스트레스를 견디고 주말을 헌납하고(그 당시는 시간외 수당 같은 것도 없었다) 집에서도 일하고 하계휴가도 반납했다.
결국 이런 Quitting이나 충성이나 자기의 성격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나에 대한 긍정의 태도,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꿀만 찾아다니다가 겨울엔 어떻게 할 것인가 동면을 할 것인가 새끼를 만들어 놓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꿀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켜 저장할 것인가 겨울에도 남아 있도록 변화시킬 것인가. 양쪽 모두 진화의 한 방법에 될 것이다.